보험사의 일명 ‘셀프 손해사정’을 줄이겠다는 금융당국의 대책에 대해 ‘효용성 없다’는 날 선 비판이 나온다. 금융당국은 자회사에 손해사정 업무를 과도하게 위탁할 시 위탁·평가원칙 등을 공시하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공시 방안이 보험사에 유리하게 정해졌다는 게 비판의 골자다.
셀프 손해사정은 보험사 자회사에 손해사정을 위탁하는 것을 일컫는다. 자회사가 손해사정을 진행하면 보험금을 과소 지급할 개연성이 크다.
9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각 보험사는 오는 7월부터 손해사정 위탁건수의 50% 이상을 자회사에 맡길 경우 위탁사 선정 및 평가 기준 등을 이사회에 보고하고 이를 공시해야 한다. 지난 3월 금융위원회가 이 같은 내용을 발표한데 따른 것이다.
이에 올 상반기 중으로 보험협회가 모범규준을 개정할 예정이며, 하면 이를 보험사 내규에 반영한다는 게 금융당국의 복안이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4일 보험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 해 법제화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셀프 손해사정을 막겠다는 금융당국의 이번 대책은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위탁건수로 산정한 공시 기준은 당초 제시된 안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 배경이다. 처음에는 손해사정 공시 기준에 건수는 물론 금액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알려졌다.
한 손해사정 업계 관계자는 "처음 위탁비율 산정을 어떤 기준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위탁건수, 지급수수료, 보험금지급금 규모 등 3개 안이 제시됐다"며 "산정 기준으로 지급수수료를 채택했다면 생보사로서는 자회사에 넘기던 우수물건을 대폭 줄여야 했을 것"으로 진단했다. 이어 "우수물건이 줄어들면 자회사의 인력 감축 등 여러 잡음이 터졌을 것"이라며 "이를 우려한 생보업계의 목소리가 반영돼 산정 방식이 위탁건수로 최종 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들은 손해사정 업무 상당수를 자회사에 위탁해왔다. 이에 보험소비자의 권익과 공정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많았다. 보험금 지급 의무를 지닌 보험사와 보험금 산정을 맡은 자회사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기 때문.
각사 경영공시에 따르면 자산 규모 상위 3개 생명보험사(삼성생명·교보생명·한화생명)가 지난해 자회사에 지급한 손해사정 위탁비율은 평균 75.7%에 달했다. 위탁비율은 총 위탁건수 중 자회사 위탁건수 비율로, 전체 위탁건수 673만8235건 중 자회사 위탁건수가 510만1128건이었다.
문제는 위탁비율 계산을 위탁건수로 하기 때문에 공시 회피가 한결 수월해졌다는 점이다. 3사의 자회사 지급수수료비율(전체 지급수수료 중 자회사 지급수수료 비율)은 평균 93.0%였다. 전체 지급수수료 1818억700만원 중 자회사 지급수수료만 1690억4700만원에 이른다.
특히 삼성생명의 경우 위탁건수로 계산한 자회사 위탁비율은 63.9%였다. 하지만 지급수수료로 산정하면 이 수치는 92.7%로 껑충 뛴다. 즉 자회사 위탁비율을 50% 미만으로 맞추면서도 고액의 심사건을 자회사에 몰아주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단 얘기다. 공시 회피를 위한 '꼼수'가 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반면 주요 손해보험사(삼성화재·현대해상·DB손해보험)의 경우 위탁비율과 지급수수료비율 모두 생보사에 비해 크게 낮았다. 이는 물(物)보험을 다루는 손해보험 특성상 종목이 다양하고 해상보험이나 특종보험 등 외부위탁이 불가피한 경우도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보험사나 자회사에 고용된 인력만으로는 전문성과 업무량을 감당하기 어렵다보니 외부 손해사정업자에 많은 물량을 넘기는 것.
위탁건수를 산정 기준으로 채택한 것은 외부 위탁손해사정업자에도 득이 크다는 평가다. 보험사들이 서면심사 등 소액 심사건 다수를 외부 위탁업체로 넘기면서다. 손해사정 업체는 크게 3가지로 구분한다. 보험사가 출자해 만든 자회사와 함께 보험사가 직접 위탁하는 위탁손해사정자다. 마지막으로 독립손해사정업자다. 독립손사는 보험사와 연결된 것 없이 보험가입자가 직접 선임한다.
서면심사는 보험금 청구건 중 소액건 등에 대해 서류심사만으로 지급 여부와 지급금 규모를 판단하는 절차다. 통상 3영업일 내 이뤄지며 대부분 보험금 지급 결정은 서면심사 단계에서 끝난다. 건당 3000~4000원의 인건비만 들기 때문에 보험사로서는 위탁건수는 늘어도 수수료 지출은 크지 않다. 위탁비율을 맞추면서도 수수료를 챙기기 위한 수단으로 적절한 셈이다.
외부 위탁업체로서도 박리다매가 가능하므로 이득이다. 건당 받는 금액은 미미하지만 그 수가 막대하기 때문이다. 또 서면심사는 보험사로부터 매달 수수료가 결제되므로 유동성 확보 측면에서도 유리하다. 최근 사람인 등 채용 전문 플랫폼에서 서면심사역을 모집하는 공고가 부쩍 증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달리 독립손해사정사는 수혜의 사각지대에 놓일 것이란 관측이다.
현행 법령상 보험소비자는 보험금 청구시 독립손해사정사 선임을 요청할 수 있다. 보험사가 이에 동의하면 손해사정 비용은 보험사가 부담한다.
하지만 그 활용 사례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앞서 3개 생보사의 경우, 지난해 보험소비자에 의한 독립손해사정사 선임요청건수는 총 36건(삼성생명 8건‧교보생명 11건‧한화생명 17건)에 그쳤다. 심지어 삼성생명은 1건, 교보생명은 3건의 요청건을 거부해 사실상 독립손해사정사 선임 사례는 32건이었다.
한 손해사정업계 관계자는 "위탁건수로 위탁비율을 산정하는 방식은 보험사의 자회사나 위탁손해사정업자에만 유리한 구조"라며 "보험소비자가 독립손해사정사 선임권에 대해 인지하고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활성화 방안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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