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회계. 보험업계에서 다시 불거진 논란이다. 메리츠화재가 일부 보험사가 장기예상손해율을 유리하게 조정했다는 식의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다른 보험사가 반박했다는 식의 흥미 위주 보도가 이어졌고, 보험사들은 어느새 새 국제회계기준(IFRS17)의 자율성을 악용하는 ‘악당’처럼 비춰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다. 지난해 보수적 손해율 가정으로 당기순이익을 부풀렸다는 비판을 받았던 메리츠화재가 이번엔 낙관적 손해율 가정이 문제라고 지적한 것. 낙관적 손해율 가정이 보험계약마진(CSM) 상각이익을 늘려 역시 당기순이익을 키운다는 논리다.
특정 계리 가정의 변경이 예실차 이익과 CSM 상각이익 두 항목에 상반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어느 쪽 영향이 더 큰지는 일률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서로 상반된 손해율 가정이 동일하게 당기순이익 부풀리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다소 모순된 해석으로 보인다.
지난해 논란이 된 무저해지보험 해지율과 이번 장기예상손해율은 모두 계리적 가정에 해당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사안이란 주장도 나온다.
무저해지보험은 2015년 국내에 처음 출시돼 2010년대 후반부터 본격 판매됐다. 일정 기간 해약환급금이 없거나 매우 적다는 특성은 과거 상품과 달랐다. 때문에 해지율 관련 경험통계가 아직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에 각 사의 임의적 추정이 개입될 여지가 컸고, 결국 금융당국은 해외사례와 산업통계를 참조해 ‘원칙모형’이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반면 장기예상손해율은 각 사가 담보별로 축적한 경험통계를 기반으로 산출된다. 통계 기반 추정이므로 임의성이 개입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물론 IFRS17이 요구하는 ‘최선 추정’ 원칙을 따르지 않고 자사 실적을 좋게 보이기 위해 데이터를 조정할 가능성은 있지만, 그저 차이만으로 고무줄 회계라 비판하긴 섣부르다.
고무줄 회계는 보험사가 해지율이나 손해율 같은 기초 가정을 자의적으로 변경해 재무제표상 이익이나 CSM을 유리하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IFRS17은 원칙만 제시하고 세부 기준은 각 사 자율에 맡기는 만큼, 회사 간 차이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자칫 IFRS17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이번 논란과 관련해 금융당국은 각 보험사에 소명자료를 요구했고, 검토 결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에 공시된 손해율 수치가 담보별로 세분화 돼 있지 않고 전체 담보를 통합한 수치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실손담보와 비실손담보의 특성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비실손담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율이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실손담보는 갱신 주기를 통해 보험료가 인상되며 장기적으로 손해율이 개선되는 구조다. 특히 2세대 이후 실손보험은 재가입 주기 도래시 장기예상손해율 산정에서 제외된다. 이런 담보별 특성이 반영돼 장기예상손해율 그래프가 일관되지 않게 움직인다. 보험사마다 상품 구성과 통계 산출 방식이 다른 상황에서 전체 손해율 그래프 하나만을 근거로 계리 가정의 타당성을 단정짓는 건 성급하다.
업계에선 이번 논란을 각 이해관계자들이 논의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IFRS17 안착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의 시기인 만큼 억측이나 비방보다는 제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논의가 우선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보험업계 고위 관계자의 말이 이번 논란을 완화해 줄 실마리가 될 것 같다. 그는 "지난해 진행한 보험개혁회의에서 업계 재무정보를 투명하게 공시하자는데 뜻을 모았던 게 오히려 오해를 키운 측면이 있다"면서도 "이번 논란도 건전한 경영을 유도하자는 건설적인 논란"이라고 말했다. 오해를 바로 잡아야 이해도 커진다는 의미다.
또 단기 실적이 아닌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의견도 중시해야 한다. 특히 경영진은 임기 내 CSM 증가에 집중하기보다 건전성 중심의 지속 가능 경영을 중시해야 한다. 보험상품 만기가 초장기인만큼 경영진도 그에 걸맞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