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 각 보험사가 IFRS17 도입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너무 달랐던 거죠."
"일부 보험사에서 기초가정이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경험통계를 기반으로 정확한 기초가정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본말이 전도됐어요. 끝단의 손익을 입맛대로 뽑아내기 위해 앞단의 기초가정을 조정하는 게 말이 됩니까."
새 국제회계기준(IFRS17)의 세부 기준에 대해 보험사가 금융당국에 원칙을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최근 1분기 실적 공개 시즌을 맞아 보험사의 주요 수익지표인 보험계약서비스마진(CSM)에 혼란이 발생한 탓이다. 하지만 당국도 새로 정할 세부적 기준이 많지 않다는 게 보험회계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16일 업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IFRS17 도입으로 초래된 보험업계 혼란과 관련해 이달 중 CSM 산출 가이드라인을 마련키로 했다. 하지만 당국이 마련한다는 가이드라인은 사실상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CSM 산출에는 할인율, 위험률, 손해율, 유지율, 사업비율 등 다양한 계리적 가정이 영향을 끼친다. 금융당국은 이중 직접 산출한 할인율 곡선만을 홈페이지 게시를 통해 보험사에 제공할 뿐 나머지는 각사 자율에 맡겼다.
IFRS17은 회계에 대한 큰 원칙을 주고, 나머지는 각 보험사가 경험통계 등을 적용해 산출할 수 있게 한 것이 골자다. 다만 각사의 계리적 가정이 잘못될 경우 예실차가 커진다. 예실차는 보험금, 사업비 등에서 예상했던 것과 실제의 차이를 말한다. 예실차가 확대되면 보험료 차이만 CSM 조정에 반영하고 나머지는 즉시 손익으로 인식한다.
예실차가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보험사의 계리적 가정이 잘못됐다는 의미다. 이때는 CSM 자체를 재평가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 당국이 제재에 나설 수도 있다. 예실차가 커진 보험사를 관리감독하는 것이 금융당국의 주요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야 할 상황까지 왔다는 것은 그만큼 업계가 혼란하기 때문이다. 계리적 가정에 대한 회사별 편차가 크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한 업계 전문가는 "손해율에 따른 보험료 조정분이 보험사마다 제각각"이라면서 "특히 일부 보험사가 경험통계에 기반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가정보다는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가정한 것이 문제"라고 밝혔다. 이어 "당장은 낙관적인 가정으로 재무상태나 손익을 좋게 보이게 할 순 있어도 연말 예실차가 나오면 기초가정을 재조정해야 하는 등 여러 문제가 터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종환 법무법인 화현 금융전문위원도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에서 당초 기준서를 만들 때 보험사의 향후 손익 등이 IFRS17 도입을 기점으로 4~5년간 큰 차이가 없도록 만들었다"면서 "기준을 바꿨다고 이익이 3~4배씩 부풀려지는 건 보험사들이 기준서의 지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금감원이 제시할 가이드가 계리적 가정에 일부 밴드를 제시하는 것 정도라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유 전문위원은 "IFRS17 기준서는 보험계약 부채의 측정과 인식 방법에 대해 이미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면서 "IASB가 30년 이상 걸쳐 개념과 기준을 마련한 상황에서 개별 금융당국이 제시할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어 "세부 기준에 대한 업계의 요청은 기준서를 위배하는 일"이라며 "기준 요청에 앞서 기준서에서 제시하는 원칙부터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한편 CSM은 보험사가 보유한 보험계약에서 미래에 얻을 것으로 추정되는 미실현 이익의 현재가치다. 위험조정(RA)도 보험료에 포함했다는 가정 아래 미래 서비스 제공에 따라 이익으로 전환될 미실현 이익의 현재가치다. 우선은 보험부채로 인식되지만 향후 보험서비스를 제공함에 따라 상각되면서 보험수익으로 인식된다.
지난해 결산시점의 CSM 산출 결과 업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각 보험사마다 적용한 계리적 가정이 제각각이다보니 도출된 손익과 재무상태의 회사 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던 것. 특히 지난해 결산공시를 신구제도 아래 비교해 공시했는데 그 괴리가 생각보다 커 기업 순위에도 지각변동이 생겼다.
순이익 기준 손보업계 2위인 DB손해보험이 IFRS17 적용시 1위인 삼성화재를 제친 사례가 대표적이다. 구회계제도(IFRS4) 아래서 삼성화재의 지난해 당기순이익(별도기준)은 1조1141억원, DB손보는 9806억원이었다. IFRS17을 적용하자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삼성화재의 당기순이익이 1조4764억으로 DB손보(1조6703억원)보다 작아진 것.
생보업계도 비슷하다. 구회계제도 아래서 삼성생명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6167억원, 한화생명은 3543억원이었다. 하지만 IFRS17 적용시 삼성생명은 1조2200억원, 한화생명은 1조223억원으로 변경됐다. 당초 2배 가까운 차이였지만 턱밑까지 바짝 좁혀진 셈이다. IFRS17 아래서 도출된 국내 보험사의 장부가치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금융당국도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금감원은 지난 11일 보험사 CFO(최고재무책임자) 간담회에서 실손의료보험 손해율과 무·저해지 보험 해약률 등 주요 계리적 가정에 대한 세부 기준을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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